매거진 | [FOOD & WINE] 양진원 대표의 와인 마리아쥬 #45. 충청도 음식과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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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라셀라 작성일2019-12-03 13:47 조회47,20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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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에게 충청도는 유달리 친근한 곳이다. 지역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것을 넘어 부모님의 본가가 충청도이기도 하고, 80년대 초반 대덕 연구단지가 형성되면서 아빠의 직장이 옮겨가 나도 덩달아 방학 때마다 자주 방문해 많은 추억이 쌓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충청도에는 비도 눈도 심하게 오지 않고 날씨도 미적지근 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좋은쪽으로 해석하자면 극단적인 기후가 없으니 농업이 성하고 서해에는 좋은 어장이 있어 곡식과 채소 그리고 해산물도 풍부하다. 음식은 사치스럽지 않고 양념도 많이 쓰지 않아 슴슴한 편이다. 상대적으로 느리고 유순하다는 사람들과 같이 어찌 보면 좀 특징이 없고 밍밍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역 음식이 아닌가 싶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타 지역 음식들 사이에서는 언뜻 매력이 없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와인러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스타일의 한식이야말로 페어링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병천순대와 레꼴 N.41 콜럼비아 밸리 시라 L’Ecole No.41 Syrah
병천순대는 돈육 공장이 근방에 들어온 약 50여 년 전부터 만들어졌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아우내 장터’에서 많이 팔리고 성행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순대가 되었다. 돼지 창자 중에 가장 가늘고 부드러운 소창을 이용해 한결 섬세하고 담백하다. 페어링 추천 와인은 향신료의 아로마가 가득한 레꼴 No. 41 콜럼비아 밸리 시라. 마일드한 병천 순대에 후추를 톡톡 뿌리는 것 같이 멋들어지게 잘 어울리는 조합을 맛볼 수 있다. 시라 품종을 메인으로 하고 소량의 그르나슈를 블렌딩 해 좋은 옷감처럼 촘촘하면서도 곱게 잘 짜인 질감을 맛볼 수 있으며 순대와 좋은 밸런스를 이룬다. 뉴 오크통을 30% 사용, 18개월간 숙성했으며 필터링을 하지 않았다.
태안 대하와 샴페인 바론 드 로칠드 브뤼 Champagne Barons de Rothschild Brut
‘대하축제’가 열리는 서해안 안면도에는 새우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다를 보며 먹는 해산물 맛, 상상이 되는 그 굉장한 맛을 다행히 서울 우리 집에서도 쉽게 재현할 수 있다. 우아하게 샴페인도 한 잔 곁들이면서. 싱싱한 새우를 사다가 왕소금을 냄비 바닥에 깔고 대하를 냄비에 쏟아 넣은 후 뚜껑만 닫으면 끝. 순식간에 새우 머리를 입에 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파괴력을 지닌 감칠맛 폭탄이 완성된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에는 오직 맛있는 와인만이 대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12월에 더욱 빛을 발하는 샴페인을 추천한다. 새우가 익어가길 바라보며, 통통 터지는 질감을 즐기며, 머리를 와자작 씹으며 한 모금. 식사를 하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라면, 어디에 가지고 나가도 환영받는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과도 같은 ‘바론 드 로칠드’가 제격.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로칠드 가문의 세 개 분파인 무똥, 라피트, 클라크(Clarke)가 각각 1/3씩 지분을 투자해 만들었다. 숙성 지속력이 탁월하며 고급 밭에서만 서식하는 샤도네이와 피노 누아만을 블렌딩했고 리저브 와인을 40% 사용해 기본급 와인에서도 남다른 깊이감을 맛볼 수 있다. 낮은 도자쥬(5~7g/L)로 산도가 잘 살아있어 리프레쉬한 기분을 제대로 선사한다.
단양 마늘만두와 메나데 노쏘 Menade Nosso
단 한 번도 제대로 경험을 해보지 않고 글을 쓴 적이 없건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직 단양 마늘만두를 먹어보지 못했다. 마늘 만두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택배 주문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 대신 마늘이 잔뜩 들어간 파스타와 함께 메나데 노쏘를 테이스팅 해보았다. 한겨울에 만난 메나데 노쏘는 동치미 국물처럼 시원~한 맛이 있었다. 루에다 D.O.의 베르데호 100%로 만든 와인인데 그간 만난 베르데호는 좀 들떠 있었다면 이 와인은 베르데호가 내추럴 스타일로 차분하게 옷을 차려입은 듯한 기분. 신선한 월계수 잎, 이스트, 짱짱한 산도가 매력적이며 청양고추와 마늘을 이겨내는 힘이 있다. 이산화황 미함유(최종 결과물에는 7g/L), 히스타민 미함유, 비건, 알러지 프리, 글루텐 프리 그리고 유기농 재배 와인이다.
천안 호두과자와 다우 파인 토니 포트 Dow’s Fine Tawny Port
새벽 1시. 지금 이 글을 호두과자와 다우 파인 토니 포트를 마시며 쓰고 있다. 사실 2주 전부터 틈틈이 복용하고 있다. 도수가 높은 주정강화 와인은 나같은 저질 주량을 지닌이들에게 오히려 최적화된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니 이렇게 매일 조금씩, 와인 한병으로 매일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다우 파인 토니 포트는 가성비 갑 중의 갑. 3년간 오크통에서 숙성을 한 후 출시되는데 황갈색의 와인 컬러를 따라 ‘토니 포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달콤한 향신료와 견과, 말린 살구, 건포도와 같은 아로마를 지녀 호두, 아몬드, 브라질너트와 잘 어울리며 당도 밸런스가 좋아 어지간한 디저트에 와인이 밀리지 않고 팽팽한 마리아주를 보여준다. 언젠가 한 봉다리 사다가 냉동고에 얼려둔 호두과자가 있다면 다우 파인 토니 포트와 함께 어딘가 모르게 입이 궁금한 긴긴 겨울밤을 더 알차게 살찌울 수 있다. 곶감 호두쌈, 단팥이 들어간 호빵, 견과류가 들어간 떡, 약과를 곁들여도 흡족하다.